
"당신, 괜찮아?"
눈으로 덮인 강을 경계로 북쪽. 도시를 지키는 광활한 폐허지대에서 작정하고 걸으면 두세 시간 남짓.
늑대와, 도적떼로 변한 주민들이 자주 출몰하는 이 지역에 제정신 박힌 사람은 드나들지 않는다. 죽고 싶거나 혹은 누구를 죽이고 싶거나.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해진 이들이 발을 옮기는 곳이다. 그러니까 위험에 처한 모습을 보더라도 보통은, 피차간 그냥 못 본 체 하고 지나간다. 습격해서 물건을 빼앗지나 않으면 다행일까. 카이토 다이키 또한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이 근방을 오고갔으나 - 남자는 어디를 보아도 이방인이었다.
게다가, 눈에 미끄러져서 뒤로 넘어졌다. 방금 전까지 멋들어진 사격 솜씨를 피로하며 도적무리를 쫒은 주제에. 바위 그늘 뒤에 숨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이토는, 자신도 모르게 뛰쳐나가 쓰러진 남자를 살폈다. 가벼운 뇌진탕을 일으킨 것인지, 얼마간 있자
"으으..." 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남자는 눈을 떴다.
"정신 들었어? 저기, 눈 뜨자마자 이런 소리 듣는 건 별로겠지만 이런 옷차림으로는 얼어 죽어. 그리고 여기는 위험하니까, 강 아래로 내려가도록 해."
"대충 알겠......지 않아."
뭐라는 거지. 상반신을 일으킨 남자는, 뭐가 문제인지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는 통증을 느꼈는지, 자신의 뒤통수를 조심스럽게 더듬어보다가 손에 피가 묻은 것을 눈치 채고 싫은 얼굴을 한다. 그야 뒤로 넘어졌으니까. 눈이 충격을 흡수했을 테지만 돌이라도 있었으면 찍히는 것도 있을만한 일이다.
" - 아니야. 대충 알겠어. 뭔가 에게 공격받아서 쓰러져 있었던 거군."
"응?"
남자의 말에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낀다.
"아니야 그건. 공격받긴 했지만 훌륭하게 격퇴했고, 그렇지만 그 뒤에 미끄러져서 뒤로 넘어갔어."
"......미끄러졌다고? 눈밭에서? 이 내가?"
"이 내가, 까지 말할 일이니...?"
"......어이. 네 이름은?"
남자는 떨떠름한 얼굴로 카이토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런 것은 묻기 전에 먼저 자신의 소개를 하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그렇지만 남자의 목소리에는 알 수 없는 힘이 존재했다. 설득력이랄까, 터무니없는 것을 이야기해도 왠지 그러려니 하게 되어버리는 - 지배하는 부류에 속할지도 모른다. 어린아이처럼 발라당 뒤로 넘어졌지만. 짧은 만남이었으나 카이토는 그렇게 판단했다.
"카이토, 다이키."
"평범하군."
"......예의 상 묻는 거지만, 그쪽은?"
"예의 상, 묻기 전에 말했어야 했겠지만, 안타깝게도 기억나지 않아."
"그렇군. 뒤로 넘어질 때 머리를 부딪쳐서 그런거겠지. 제법 시원스럽게 쓰러지던데."
작년에 사냥꾼 마을에 사는 노인도, 곰에게서 도망치다가 나무에 머리를 들이받은 일이 있다. 그때 노인이 가볍게 기억상실을 겪었다. 나이에 비해 말도 안 되게 총명하고 정정한 이였기에 주위에서 이변을 깨달았지만. 안 그랬다면 다들 노망이거니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얼마간 얌전히 있으면 금방 돌아올 거야. 안 돌아와도 별 수는 없지만."
"쓸데없이 침착하네. 너는."
"이런 세계에서 살다보면, 싫어도 이렇게 되어버려."
이렇게 새하얗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는.
"이참에 당신도 한 달 정도만 있어봐. 몸도 마음도 빙점 아래로 내려가는 기분이 될 테니. 뭘 봐도 아무 생각도 안 들 걸. 나조차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게 돼. 눈이, 정말로 너무 너무 내려서."
그들이 이렇게 밖에서 이야기 하는 사이에도 무표정한 잿빛 하늘은, 또다시 흰 종언을 고하려 하고 있다. 오늘은 또 몇 명을, 무슨 이유로 거두어갈까.
"그래서, 가끔 머리가 이상해 질 것 같아."
남자는 "얘가 무슨 소릴." 하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본다. 그렇지만 카이토는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몇 안 되는 능력으로. 이 남자는 정진정명 이방인이다. 기억이 있든 없든 - 그것조차 진짜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밖에서 온 자다.
카이토가 관리하는 "세계"는, 그의 기억이 닿는 한 늘 차갑고 쓸쓸했다.
심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물리적으로. 그렇지만 인간은 사는 장소에 적응하면서 진화에 나가기 때문일까. 이 세계에 사는 이들은 이 세계와 어울린다고 카이토는 늘 생각했다. 냉정하게 판단하고 냉정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아차 하는 사이에 죽게 되니까 별 수 없는 것이다. 나라가 아직 나라로 작동하고 있는 지금에야, 난민 구제소 같은 것은 존재하지만, 거기까지 돌아 갈 장작은 부족하고, 그래서 하룻밤 사이에 몇 명씩 죽어나간다. 입을 줄이기 위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노인이나 아이를 슬쩍 버리고 가는 사람들도 있다. 죽으면 - 그저 들에 내어버린다. 이름 없이 죽은 자를 위한 절차와 예식은 늘 성 밖에 있다. 먼저 도시 밖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옷가지를 벗겨가고, 그 뒤에 남은 육신은 늑대와 새들이 처리한다. 그러고도 남은 것은 얼어붙어 땅과 분간할 수 없게 된다. 검은 숲 깊은 곳에 사는 어느 부족은 인간의 뼈를 세공해서 장신구로 사용한다는데, 카이토는 아직 만나 본 적이 없다. 봄이 되고, 날씨가 조금 풀리면 말도 안 되게 그로테스크한 풍경이 종종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차라리 겨울이 계속되는 것이 나을지도. 픽픽 쓰러지는 이들에게는 미안한 소리지만 봄이 온다고 해도 딱히 달라지는 것은 없으리라. 이름뿐인 관리자와 - 몇몇 통찰력을 지닌 이들은 아는 사실이었다. 어차피 이제 이 세계에 남은 것은 고요한 종말뿐. 한손으로 셀 수 있는 횟수의 봄이 잠시 스쳐지나가고 나면, 그 뒤에는.
뒤에는.
"카이토."
"......아 미안. 잠깐 딴 생각을 하느라. 그래서, 음."
" - 강 아래로 내려가라고 했었나. 아닌가. 아직 머리가 멍 해."
"응. 조금만 걷다보면 성벽이 보일 텐데......"
말하다 말고 남자의 얼굴을 잠시 바라본다. 그리고 무언가를 결심한 듯, 카이토는 그도 상대방도 의아해 할 선택을 내렸다.
"아니야. 내가 같이 갈 게."
남자가, 의외라는 듯 두 눈을 크게 뜬다.
카이토 또한 자신의 선택에 약간 혼란을 느꼈다. 그렇지만 기억상실증 환자를 눈밭에 그냥 내팽개쳐 두는 것도 너무한 일이고 - 게다가 그는 외부인이고. 원주민이라면 알아서 잘 갈 테지만 그는 그런 것도 기대할 수 없고, 또, 이유를 대려면 몇 가지든 더 댈 수 있을 것이다. 관리하는 입장에서 합리화는 필수적인 능력이니까.
"이런 상황이라 그래주면 고맙지만 - "
"딱히 중요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야. 게다가."
"게다가?"
"실은 오랜만에, 웃었어. 당신 덕분에."
그렇게 뒤로 훌륭하게 엎어지는 건 또 처음 봤어. 다리가 길어서 그런가. 다시 떠올려도 역시 웃기다. 웃을 일이 별로 없는 이 세계에서 그것은 둘도 없을 귀중한 체험이었다. 입을 가리고 고개를 돌리자, 남자가 다양한 감정을 품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 그거 잘됐네."
"응..... 그러니까, 아니 미안...... 기억을 잃어서 불안할 텐데. 이런, 결례를......"
"뭐 됐어. 웃고 나서 책임 안지는 것 보다야 낫지."
"그러니까 도시까지, 안내해줄게."
"도시까지만? 다친 사람을 보고 실컷 웃은 주제에? 그 뒤에는?"
"아니, 그, 딱히 별 생각 없이 한 말이니까. 그리고 실컷 웃지도 않았어. 약간 웃었을 뿐이야."
"마찬가지다."
"- 알겠어. 알겠으니까. 걱정하지 마."
"걱정? 내가 그런 걸 왜 해."
뒤통수가 깨져 기억 장해를 입은 인간으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 당당한 기세다. "걱정은 네가 해야겠지. 이런 기후에 이런 상황에, 도시 분위기도 쉽게 상상이 가. 외부인을 데리고 들어오면 곤란해지는 건 네 쪽이잖아." 생각도 당당하다. 병자 주제에 오히려 카이토를 신경쓴, 다기보다는 '네 수완을 기대해보지.' 하고 있었다. 카이토의 입장을 배려한다고 하기에는, 그러니 혼자 가겠어 - 하는 태도도 아니고. 이 정도가 되면 당당함을 넘어서 뻔뻔하다고 표현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까랑은 태도가 좀 다른 것 같은데......"
"그때는 멍해서 머리가 제대로 안 돌아갔어."
"이게 보통이라 이거지."
"그런 것 같군. 안타깝게도 기억이 안 나서 뭐라 확실한 이야기는 해 줄 수 없네."
"뭐, 상관없어. 그렇지만 도시 안에서는 조심해. 당신은 이방인이고, 그렇게 건방진 태도론 쥐도 새도 모르게 칼 맞아서 내장까지 털리기 딱 좋으니까."
"내장까지냐 - "
"인간의 내장은, 향신료에 오래 절이면 의외로 맛있어."
"......"
"농담이야. 그런 얼굴 하지 마."
"그렇다고 생각했어. 그건 어떻게 처리해도 맛있다고 표현할 만한 음식이 아니지."
"......"
"흥. 농담이다. 그리고 그런 얼굴 하지 마. 넌 무표정 쪽이 보기 좋은 것 같아."
"조심하라는 충고는 철회."
두르고 있던 가죽 망토를 남자에게 넘기고, 카이토는 몸을 휙 돌려 걷기 시작했다.
"이 세계엔, 당신을 죽일만한 인재가 남아있지 않아."
"그래? 세상 일 알 수 없어. 의외로."
"아니. 나는 알 수 있어. 이 세계의 일은."
카이토의 말에 동의하는 것 처럼 옅은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쏟아지기 전에 가자. 이야기는 그 뒤에."
여기엔 더 이상 아무것도, 의미 있는 것이라고는 태어나지 않으니까.
***
"야 - 그나저나 운이 좋네요. 카이토 씨를 만나다니. 재수 없어서 못된 놈들이 발견했으면, 내장까지 털렸어요. 그냥 얼어 죽게 버려두고 가거나."
아무래도 이 동네에서는 내장까지 털린다는 표현이 흔한갑다. 의사로 보이는 노인이 준 허브티를 홀짝거리며 자신이 있는 건물의 내부를 훑어본다. 금속제질의 선반 여기저기 말린 약재니 동물이니 하는 것들이 매달려 있어 정신사납고, 좋게 말하면 생활감을 느끼게 한다.
"조수가 지금 심부름으로 외출중이라. 나는 정리를 잘 못합니다. 하하하."
"호오. 그래서, 카이토는?"
"성당 쪽에 좀 볼일이 있는 것 같던데요. 아침부터 수사들이 카이토씨를 찾아대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여하튼 어린 애에게 너무 의지한다니까. 카이토씨가 싹싹하고 유능한 사람인건 사실입니다만, 그렇다고는 해도 ... 아이고 이런. 처음 본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다니. 나도 주책이군."
"별로, 상관없어. 나이 들면 수다스러워지잖아."
"하하하. 손님은 친절한 젊은이네요."
"나도, 노인네랑 같이 지냈어서... 는, 어라."
"응? 기억이 돌아옵니까? 사실 이런 경우엔, 늦어도 일주일정도면 다 나아요. 너무 걱정 할 필요 없습니다. 딱히 걱정하는 것 같이 보이진 않지만."
"뭐. 걱정한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도 아니고. 그것보다 그 녀석 이야기를 더 해줘."
"너무 많이 이야기하면 카이토씨에게 혼날 텐데요."
의사는, 우선 한번은 몸을 사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런 시늉이라, 금방 이것저것 잡다한 것들을 들을 수 있었다.
"당신은 카이토씨의 손님이고, 외부인이니까."
그렇게 조건을 달고서, 그는 사람 좋은 의사의 시선이라 하기엔 신랄한 관점으로 도시와 - 카이토에 대한 것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카이토와 도시는 떼어놓을 수가 없는 것 같았다.
"꼭 이 도시만 그런 게 아닙니다. 여기가 수도니까, 카이토씨가 주로 이곳에 있기 때문에 그런 것 뿐.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찬가지에요."
"그러니까 뭐야...... 그 애는 결국...... 국가 최고통치자의 조언자이고 종교적 우상이고 별 읽기가 특기인 예언자이기도 하면서 사냥도 잘하고 얼굴도 괜찮은, 아이돌이라고?"
"아이돌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뭐 그렇게 되겠지요. 그러니까 너무 기대고 있어요 다들. 외부인인 당신이 보기에도 이상하지요? 이 곳."
"여러 가지로 제정신으로 보이지는 않네. 확실히. 날씨부터가. 이런 게 몇날며칠을 계속된다 이거지."
카이토가 진료소 문을 연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눈발이 굵어지기 시작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1미터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야가 나빠진다. 한참 지났는데도, 두꺼운 유리창 너머는 짙은 회보라색이다. 전혀 그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젊었을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어째 점점 나빠지기만 하는 건지. 뭐 이러는 나도 카이토씨에게 도움은 많이 받고 있습니다. 뻔뻔한 거죠. 욕했다고 일러도 됩니다."
"카이토를 욕하지는 않았잖아."
의사가 씩 웃는다. 지금의 카이토는, 국가 아이돌로써 14대, 혹은 13대째가 된다고 한다. 대대로 카이토처럼 문무겸비에 놀라운 별 읽기 능력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는데 - 게다가 선대의 기억까지 고대로 지니고 있다고 하니, 자신처럼 신앙심의 ㅅ도 없는 이들도 혹 할 만 하다.
"제가 어렸을 때는, 카이토씨가 공석이었습니다. 인간이란 건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가는 법이에요."
카이토씨가 공석이라니. 묘한 표현이다. 메시아들은 대대로 카이토라는 이름을 쓰는 것 같긴 하지만, 무언가 신 같지 않은가. 그러자 의사는 "신, 비슷한 존재지요. 지금의 우리에겐." 하고 수긍했다.
"그러니까, 신 같은게 아니에요......"
"어라. 카이토씨, 왔습니까."
"오래 걸렸네."
"이번 눈보라 때문에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아서. 아. 좋은 냄새. 나도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여기."
"감사합니다. 그리고 당신, 은, 이거."
카이토가 옆구리에 끼고 있던 커다란 짐을 건넨다. 둘둘 만 기름종이 포장을 제하자, 안에 있는 것은 두꺼운 털옷이었다.
"네 옷차림은 이거에 비해 퍽 얇다만."
"나는 이걸로도 충분."
"의사양반. 진짜야?"
노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늘 따뜻하게 입으라고 성화입니다만. 뭐어. 저러고도 이 눈보라 속을 말짱하게 다니는데, 신이란 것을 안 믿을 수가 없어요."
"거봐."
"......나도 이걸로 충분해."
"응? 따뜻하게 입어서 나쁠 것은 없잖아."
"의사양반이 너한테 하고 싶은 소리가 그거 같다만."
"흐응- 정말이에요?"
"하하. 나는 아무 말도 안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동상 걸려서 오면 외지인이고 신이고 뭐고, 둘 다 쫒아 낼 테니까요."
"차 잘 마셨어요. 그리고 이 사람 돌봐줘서 고마워요. 가자. 당신이 지낼 곳도 찾아놨어."
"호오. 열일 하시는군."
결국 의사와 카이토 양쪽의 성화에 못 이겨, 재킷 위에 두꺼운 털옷을 껴입은 채 진료소 밖으로 나왔다. 카이토도 의사도 무척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어떤 기분인지 알듯알듯하지만, 깊게 추궁할 생각은 들지 않는다.
눈보라는 여전히 끔찍했다. 어디로 가는지, 어디에 있는지 알 지 못할 정도로.
"그래서 얼마나 걸리냐, 목적지까지."
들리면 듣고 말라면 말라지. 그런 심정으로 중얼거렸으나, 카이토는 놀랍게도 쉽게 알아들은 것 같았다. "괜찮아. 조금만 걸으면."
이런 날씨에서 조금만은 보통의 조금만은 아닐 테지만, 엄청 걸어야 해 보다는 훨씬 기분이 상하지 않는 대답이다. 멍하니, 여기서 카이토를 놓치면 날이 갤 때 까지 헤메게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자, 그 속마음을 읽은 것 처럼 카이토가 갑자기 손을 뻗어왔다.
손을 맞잡는 것은 어린아이도 아니고. 차라리 미아가 되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사양하고 싶다. 그 대신 카이토의 팔목을 붙들었다.
"나, 신 같은 건 아니야. 신은 따로 있어."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카이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나 신은 좋아하지 않아.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실은 성당 사람들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 그 사람들은 신을 좋아해. 어떻게든 해 줄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일단 진정해. 난 너보고 신이라고 하지 않았으니까. 그보다 여기가 어딘지 설명해."
"응? 어딜 봐도 내 집이잖아. 열쇠로 열고 들어온 것 못 봤니?"
"아니, 크잖아. 어딜 봐서 1인가정이 살 집으로 보여 이게."
"의사선생님에게, 그런 거까지 들었어?"
"정보수집력도 누설력도 최고인 분이던데. 나한테도 네 친구냐 아니면 애인이냐 그런 것까지 묻고."
카이토가 손님을 데려온 것은 처음, 이라고 하며 약간 놀란 눈치였다.
"아니야. 입이 무거운 분인데. 당신이 맘에 든 거겠지."
"그런 거라면 좋겠군."
"그런 거야 - 어디든 마음에 드는 방을 사용해. 가능하면 1층으로. 2층도 상관없지만 정리하는데 깨나 시간이 들 걸... 그리고 사람이 찾아오면 없는 척 하고, 또......"
"너, 생각보다 위기감이 없구나."
"위기감?"
첫인상은 제법 냉정한 인간이란 느낌이었는데. 짧은 시간 동안 그러한 인상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유리나 금속질의 것이라 느꼈던 반짝임은 아무래도 호수 위의 살얼음이나 뭐 그런 것으로, 손을 대면 금방 녹아버리고 마는 종류였나 보다. 인간이란 참 다채로운 존재다. 그러한 것을 새삼 깨닫는다.
"무슨......"
"네 입으로 위험한 동네라고 했잖아. 그런데, 대뜸 처음 만난 사람을 집에 끌어들이는 건 무슨 짓이야."
"당신은 이 세계 사람이 아니잖아."
"무슨 상관이람. 다른 세계라고 착한 인간들만 있을 거라고 생각하냐?"
"당신은 나쁜 인간 이야?"
"......기억이 안 나서, 뭐라고 대답하기가 힘든 질문이야. 그렇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고결한 것 같아. 너한테는 좋은 소식이로군."
"그럼 된 거네. 나한테 나쁜 짓 하지 않을 거지?"
"안 - 해."
카이토는 풀썩 소파에 드러누웠다. 먼지 하나 일지 않는 것이, 상당히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는 것 같다.
"못 하는 거야. 내 생명은 신이 정해놓은 일정표에 고정되어 있어서, 당신이 신이 아닌 이상 거두어가지 못해. 유감스럽게도."
"뭐야 그게. 엄청 아는 사이처럼 말하는군."
"알고 있으니까. 아까도 말했잖아. 알고 있다고."
"거 참, 발도 넓으셔."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말하기가 귀찮아진 것일지도 모르지. 그렇게 판단하고 잠시 집 안을 둘러본다. 크고 깔끔하지만, 살풍경하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가 선언한대로 위층의 방들은 잡다한 서류와 상자로 가득 차 있어서 사람이 살기 편한 장소가 아니었다. 이런 곳에서 쾌적하게 지내려면 사이즈가 최소 고양이보다는 작아야 할 것이다.
내려와서, 다시 한 번 카이토에게 말을 붙여본다. 이번에도 대답이 없어 유심히 살피자, 잠들어 있었다.
"뭐 이런......"
멍청한 인간이.
조심성이 없어도 너무 없는 것 아니야. 기억이 돌아온 자신이 고결한 쾌락살인마라든가 뭐 그런 모순적인 존재라면 어쩌려고. 죽이지 못한다고 했지, 괴롭히지 못한다는 소리는 분명 신도 하지 않았을 텐데. 퍼뜩, 문이 제대로 잠긴 건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다행히 자물쇠는 제대로 채워져 있었다. 몇 군데에 있는 창문은 모두 나무덧문까지 꼭꼭 잠겨 있어서, 보안상의 문제는 없어보였다.
어째서 손님인 내가 이런 걸 고민해야 해. 설원에 쓰러져 있던 자신을 구해준 것은 고맙긴 하다만.
카이토의 자는 모습을 보고 있자 괜히 자신까지 졸려지는 기분이었다.
***
맑은 밤하늘을 보는 것은 무척 오랜만이다.
낮에는 그치는 눈도, 밤에는 거의 매일 내렸다. 그렇지 않은 밤이 있었다고 해도 카이토는 볼 수 없었다. 집에 돌아오면 피곤해서 금방 쓰러져버리니까. 꿈도 꾸지 않을 정도로 깊은 잠은 한순간에 지나가고,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은 탁한 어둠이거나 새하얀 도시. 또 그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다시 반복. 희망도 미래도 없다는 것을 카이토는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비우고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을 뿐이다. 깊게 생각하면 미치기 십상이다. 돌아버린 세계에서는.
"일어났어?"
"어떻게 안 거야."
"부스럭거리는 게 보였으니까. 방에 들어가서 자지, 왜 당신까지 마루에서."
"뭘 멍하니 보냐."
"달. 드물거든. 이렇게 깨끗한 하늘은."
"로맨티스트로군."
"그런가."
남자가 다가온다.
카이토는 미추에 큰 관심은 없으나, 남자가 잘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안다. 별 의미는 없지만. 카이토는 토끼였어도, 새였어도, 눈밭에 나뒹군 그를 그대로 버려두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인 이상 누구라도.
일탈을, 꿈 꾼 것일지도 모른다. 주민들을 이끌고, 최소한의 사망자로 이번 겨울을 버티는 것 외의 무언가 다른 것을 생각하게 해 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그 기대는 보기 좋게 들어맞았다. 카이토는 벌써 이 내방자가 마음에 든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살갑게 굴게 된다.
"저기."
"뭐야."
"죽여 볼래?"
"뭔 소리야. 잠 덜 깼냐. 그럼 다시 누워."
"아니. 당신은 여기 사람이 아니지. 그렇다면 여기를 만든 신의 법칙에도 매여 있지 않을지도 - 하는 생각이 들어서. 문뜩."
"그런 살벌한 생각을 문뜩 하지 마."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끝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 그렇지만 내가 포기하면, 여기에 있는 사람들도 끝나버리니까."
"그 신인지 뭔지 하는 작자에게 끝내달라고 하면?"
감정이 담겨있지 않은 목소리였다.
"아까 안다고 했는데. 알긴 알지만 그리 친하지는 않아서. 나는 대화한 적이 있어. 그리고 그때, 너에게 전부 일임한다는 소리를 들었지. 종말이 올 때 까지, 잘 부탁한다고."
"뭐야 그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인 걸. 정말로, 뭐야 그게."
"어떤 놈인데, 그 신은."
"으응. 얼굴도 목소리도 몰라. 유적이 있어. 아까, 당신을 만났던 건 그 유적에 가는 길이었어. 거기에서 아주 가아아아끔 신탁을 내려주거든. 혹시나 해서 가보고는 하지만 역시."
"역시?"
"몇 대 째, 감감 무소식. 그리고 나와 마지막으로 이야기 했을 때의 태도로 봐서는, 버림받은 거겠지. 이 세계는."
더 이상 가능성이 없어. 카이토는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본다. 이 손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관리자라고는 하지만, 내게 있는 권한은 별을 보고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대강 알 수 있는 것 정도. 그리고 남은 기한을, 알 수 있는 것. 이건 관리라기보다는 관측자겠지. 무엇 하나 바꿀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세계의 수명이 다 한 이상, 관리권한이 있다 해도 무언가를 극적으로 바꿀 수 있지는 않았겠지만. 최소한 이렇게 서서히 얼어 죽어 가는 결말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남은 봄은 얼마 안 돼. 그 뒤에는 영원한 겨울이 찾아오고 - "
"전부 끝나는 건가."
"응... 최소한 살아있는 것들은 전부."
"너는 살아있는거야?"
"어떻게 보여?"
"글쎄다."
"글쎄다 라니."
"그래서, 나를 구한거야?"
"맞아. 무서우니까. 고통스러우니까. 이방인인 당신에게 약간의 기대라도, 걸고 싶었어. 미안해."
"흐음."
남자는,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대 받는 것에는 익숙하니까." 따위를 말한다. 직업상의 문제인지, 성격상의 문제인지. 어떤 상황에서도 여간 풀죽지 않는 것 같다. 죽여 달라는 소리를 들으면, 보통은 기분 나빠 할 것 같은데. 내방자는 개의치 않아 했다.
"그거 말고는? 딱히 없나."
"어떤 의미야?"
"예를 들면 - 이 세계를 나가고 싶다거나."
"말도 안 돼. 그런 건 있을 수 없어."
"왜. 어차피 나는 다른 세계 출신이다. 여기에 기어들어 왔단 건, 문을 알고 있다는 소리겠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카이토는 고개를 저었다.
"나 혼자? 도망? 불가능 해. 가능하다고 해도, 그러면 이 세계는 어떻게 되는데?"
"어차피 망하기 일보 직전이라며. 네 예언, 이 아니라 네 관측정밀도로 봐서는 틀릴 리 없잖아. 그런 거라면 버려도 딱히 - "
"그러면 나도 신과 마찬가지가 되잖아."
가능성이 없다고 버려버리면. 가치가 없다고 버려버리면. 그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버려진 괴로움은 자신만 겪으면 충분하다. 지금,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사라지면 그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을 것이다.
"너, 의외로 정이 많군. 얼음 인간 같은 겉보기와는 다르게. 알맹이가 엄청나게 말랑말랑하잖아. 하긴 뭐. 그걸 알아서 너를 관리자로 만들고 도망친 걸지도 - "
"지금 시비 거는 거야? 그럴 거면 나가주겠어?"
"뭐? 춥거든 - "
"......됐어. 진심으로 한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할게."
"진심인데."
진심으로 한 소리야. 처음부터 끝까지. 남자가 카이토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리고는 기도하는 것처럼, 손을 감싸 쥔다. "너는, 이 세계가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버려졌다고 생각하나본데." 딱히 무언가의 의도를 가지고 힘을 담아 한 일은 아니라, 빠져나오려고 하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 테지만, 카이토는 얌전히 있기로 했다. 그럴 필요를 못 느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체온을 느끼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런 게 아닐 거야. 신은 처음부터 그냥 심심해서 만들었고, 잊었기에 내버려 둔 것뿐이야. 처음부터 아무 생각이 없었어. 이런 세계엔."
"어쩜, 그렇게 심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거니? 밖의 사람은 전부 너 같아?"
평온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그가 고하는 것은 비극보다 더한 내용이었다. 비극에는 의미가 있지만 신의 행동에는 그러한 의미조차 없었다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맞는 말 같다. 아니, 그의 말이 틀리다고 해도 이제 와서 대관절 뭐가 달라질까. 그렇기에 화는 나지 않았다. 그대로 얼마간 있자, 상대방의 침착한 페이스에 휘말린 것인지, 혹은 지친 것인지, 분노는커녕 오히려 처음 느껴보는 편안함을, 카이토는 자신의 마음 안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네가 이 세계에 대해 부채의식을 느끼는 건 쓸모없는 일이야. 이건 네가 관리자로써 부족해서 생긴 결말도 아니고, 이 세계 주민들이 유독 해이해서도 아니고, 잘잘못을 따질 일이 아니야. 내가 하는 말이니까 맞아. 그리고 나는 처음부터, "
"처음부터?"
"......그 전에 하나만 묻자. 너, 신을 어떻게 생각하냐?"
"나? 나는 - "
신을. 어떻게.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문제다. 역시 진지하게 생각했다간 몇날 며칠을 끝나지 않는 가능성의 사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니까. 이랬더라면, 저랬더라면, 거기서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러면 혹시 버림받지 않았을까.
그런 식으로 한 세대를 건너 저번 생의 자신으로, 또 그 이전으로 후회를 거듭하고 또 거듭할수록, 답을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빌고 빌어봐도 전혀 대답이 없어서.
어째서, 사랑받지 못한 것인지 매일매일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나날도, 분명 자신 안에는 존재했으리라.
그러나 이방인의 말이 사실이라서, 자신이 아무리 노력했어도 선택받는 것이 불가능했다면. 이 세계는 처음부터, 그저 얼어 죽기 위해 심심풀이로 만들어진 것뿐이라면. 함께 살아갔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하루하루를 연명하기 위해서 고통 받던 힘냈던 이들을. 이름도 무엇도 떠오르지 않지만, 그들이 해 낸 일은 장난 같은 게 아니었다. 머리를 비우고 마음을 비우고 그럼에도 버틴 것은, 결국에는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바람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만난다면 서러움에 울어버릴지도 모르지. 어째서 이런 짓을 했냐고 물어볼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는 해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증오해. 저주할거야. 목숨이 다 하는 날 까지."
"그런가. 그러면 뭐. 안심."
"......응?"
"아니 뭐. 혹시 아직 애정이 남았다거나 하면 좀 찔릴 텐데. 그렇게 싫다면, 이제 와서 저주할 건수가 하나 더 생기는 것뿐이지. 어차피 미움 받는 것에는 익숙하고."
아까는, 기대 받는 것에 익숙하다고 하지 않았나.
"양 쪽 다 익숙해." 몹시 퉁명스러운 표정이다. "그런고로. 나는 내 계획대로 하겠어. 부수고, 데리고 나간다."
"......저기."
"뭐야. 질문은 안 받아."
"무슨 이야기인지, 전혀 이해가 안 가."
"아아. 둔하구만. 기억이 돌아왔어."
"그건, 그건 알겠지만. 그래서?"
"자기소개가 늦었네. 내 이름은 카도야 츠카사다. 가끔은 지나가는 히어로, 또 가끔은 세계의 파괴자."
동시에, 네 신의 이름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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