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블레이드 완결 스포일러 有
* 켄자키 카즈마와 아이카와 하지메 간 BL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이카와 하지메, 기원
*
초록으로 가득 찬 숲 그늘이 눅눅한 여름의 냄새를 풍긴다. 그 그늘을 따라 고요함이 이어진 하늘 아래, 하지메는 투박한 길을 걷고 있었다. 사람의 발길이 쌓여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길은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거친 모래가 튀었다. 그는 목에 건 카메라에 튄 모래 알갱이들을 묵묵히 털어내며 손수건을 꺼내 렌즈를 두세 번 닦았다. 카메라에는 손때가 적나라하게 묻어 있었다. 이건 아이카와 하지메의 흔적이 아니다. 모두 쿠레하라 신의 흔적이었다.
하지메는 그 위에 새로이 자신의 흔적을 새기는 법을 안다. 허나 남길 수 없다. 되려 흔적하나 남을까 애지중지하며 카메라를 다룬다. 이제는 돌려줄 이 없어 돌려줄 수 있는 물건이 아닌데도, 하지메는 카메라를 마음껏 사용할 수 없었다. 인간의 손을 잔뜩 탄 물건을, 괴물은 어찌 사용할 수 없었다.
괴물이 말하기를, 무릇 인간의 흔적은 인간의 흔적으로 덮여야 하는 법이다. 아이카와 하지메는 단지 인간의 형상을 띈, 언제라도 비인 외도에 접어들 괴물이었다.
그런 괴물에게 자신조차 자신을 믿을 수 없고, 사랑할 수조차도 없는 밤이 계속되었다. 밤은 괴로움을 모르고 계속해서 괴물을 괴롭게 만들었다. 이윽고 밤을 밀어내야 할 때, 고통에 젖은 괴물은 밤을 걷어내는 대신 저도 아닌 인간을 사랑하는 쪽을 택했다.
인간은 밤에게 괴로움을 알려 주었다. 그 후 밤은 여전히 괴물과 함께 있었지만, 다시는 괴물을 괴롭히지 않았다. 괴물은 보답으로 괴물로부터 인간을 지켰다. 흠집보다 작은 흔적까지도 감히 인간에게 남기지 않으려 했다. 그리하여 하지메는 카메라를 선뜻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런 찰나였다.
"너는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가. 우리는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아. 스쳐 지나갈 일도 없을 거야. …그걸로 된 거야."
들려온 말은 저보고 인간으로 살아가라 하고 있었다. 이는 분명 인간이 건넨 말이었지만, 야속하게도 인간의 손끝을 타고 흐르는 피는 붉지 않았다. 인간이었던 그는 저 뱉기도 괴로운 말을 하며, 하지메를 향해 웃다 그만 돌아섰다.
하지메는 이날의 장면을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눌러 담았다. 하물며 눈 하나 쌓이지 않은 겨울 산에 바스락, 하고 덜 마른 이파리가 발에 밟히던 소리조차 기억한다. 그렇지마는 언제나 기억을 꺼내어 놓고 돌이켜 본들 돌아갈 수 없었다.
* * *
그 뒤 몇 차례나 겨울이 지나갔다. 인근 공원에 한참 눈이 쌓여있던 벤치는 눈이 걷히고 꽃향기가 피더니 초록이 싱그럽게 물들어 있었다. 여름이 익어갈 무렵이었다. 장마철이 한차례 지나간 모양인지 벤치 밑에 쌓인 나뭇잎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하지메는 이곳을 지날 때쯤이면 어김없이 그 날을 회상한다. 사실 여기는 아무 장소도 아니었다. 단지 하지메가 이곳을 지날 때마다 켄자키를 떠올렸을 뿐이었다. 아니, 이 문장은 모순이다. 하지메는 늘 켄자키를 떠올리고 있었으므로, 이 장소와 유독 연관 짓는 이유는 발에 그 날과 같은 이파리가 밟혔기 때문이리라.
세월이 지나 핏내를 풍기던 괴물은 핏내를 잊은 괴물이 되었다. 괴물은 인간의 흉내를 낸다. 흉내는 어설프다. 정작 자신의 자리에 있어야 할 인간은 괴물의 흉내를 내며 살아간다. 그 흉내는 어설프던가, 가엾기 짝이 없던가. 그로썬 알 수 없었다. 하지메는 이 사실이 사무치게 슬퍼 울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눈물을 낼 줄 몰랐다.
푸르고 맑던 하늘은 어느덧 까맣게 물들어가 별이 총총 달려 나오고 있었다. 하지메는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발밑에 나뭇잎이 아닌 무언가가 걸렸다. 자세히 보니 다 타고 껍데기만 남은 불꽃놀이용 키트였다. 장마철 전에 있던 것인지, 새벽의 이슬 세례를 받은 것인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하지메는 그를 들어 올렸다. 말하자면 그건 쓰레기였다. 아무것도 아닌 물건이었고, 아무것도 될 수 없는 물건이었다. 다만 이를 피우고 간 이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누군가의 연인일 수도 있었고, 가족일 수도 있었고, 어쩌면 홀로 왔다가 간 걸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이는 누군가가 추억을 피우고 간 흔적인지라, 정작 우리는 아름다운 추억 하나 피워보지 못했구나. 하지메는 돌연히 괴로워졌다.
* * *
“아, 혹시 그거야? 인간의 약이 안 받는다던가.”
지나온 날의 기억이다. 하지메는 본능적으로 이것이 꿈임을 알아챘다. 허나 그때처럼, 누군가 시키기라도 한 듯 곧잘 다음 문장을 완성한다.
“아니, 아니다. 인간의 약이 들었어.”
“회복력이 좋구나.”
꿈은 뒤죽박죽이었다. 회복력이 좋다는 말이 먼저 나왔어야 했다. 아하하, 이리 사소한 것까지 지적할 수 있을 만큼 무척이나 그를 추억했음을 깨닫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꿈은 꼭 자신이 꿈임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불꽃이 피어오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메는 언제 꿈을 자각했냐는 듯 금세 수마에 말려들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장면이 바뀌어 있었다.
“있지, 하지메. 불꽃놀이 안 할래?”
아. 하지메는 숨이 턱 막혀왔다. 대답하려 해도, 쉽사리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하지메의 먼발치에서는 어느덧 형형색색의 불꽃이 터지고 있었다.
“그리웠어.”
“…….”
“눈치채지 못한 척했지?”
“켄자키.”
하지메는 겨우 목소리를 내었지만, 켄자키가 한 말의 저의를 알 수 없었다.
“지금은 그 이름이 아닐 거야.”
“…….”
“아니, 네게는 언제 까지고 켄자키 카즈마겠지. 우리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고, 앞으로도 만나지 못할 예정이니까.”
“…켄자키, 나는.”
“그리 슬픈 표정 지을 거 없어. 자, 봐.”
불꽃은 여전히 아름다운 색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빨강, 하양, 노랑… 색색이 타오르는 불꽃은 그와 그 사이에 눈을 감고 들었던 그 모든 것을 비추고 있었다. 그제야 하지메는 자신이 어느 호수의 수면 위를 딛고 있음을 의식했다. 수면의 위아래로 불꽃놀이가 펼쳐졌지만, 그와 켄자키의 모습은 어디에도 비치지 않았다.
“다시 몇 번이고, 또다시 몇 번이라도 보러 와.”
벌써 불꽃이 잦아들고 있었다.
“가지 마, 혼자 두고 가지 말아줘.”
“가지 않아.”
그토록 한참 타오르던 불꽃은 더는 이어지지 못하고 이내 끊겼다. 그와 동시에 꿈이 무너져 내렸다. 공간이 일그러지고 균열이 가는 사이, 하지메는 여전히 켄자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켄자키 역시 하지메를 바라보며 무어라 했지만, 듣지 못했다. 꿈은 불꽃이 끊긴 순간부터 줄곧 묵음이었다.
* * *
눈을 뜨자 서경이 펼쳐져 있다. 거뭇하던 하늘이 푸름을 되찾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 그대로 존 모양이었다. 하지메는 여전히 손에 있는 불꽃놀이 키트를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손에 쥐어져 있던 물건은 뽀송뽀송 말라 있었다. 하지메는 그를 다시 밑으로 내던졌다.
귓가에는 아직도 꿈의 묵음이 남아 있는 듯하다. 하지메는 눈을 감았다. 묵음 사이로 파고든 새벽의 소리를 듣는다. 풀벌레 우는 소리, 나뭇잎에 맺힌 이슬이 또 다른 나뭇잎으로 옮겨가는 소리, 천체가 박동하고 구름이 맥동하며 하늘을 움직이는 소리. 보통 인간이라면 듣지 못할 영역이었지만, 하지메의 귀에는 생생하게 들렸다. 그 속에서, 같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이를 떠올리며 하지메는 기원(祈願)한다. 바라건대 자신이 말이 닿기를, 마찬가지로 자신을 떠올리고 있을 그를 향해 닿기를 기원한다.
전하고자 하는 말은 그저, 지금도 여전히 나는 너를.
"좋아했어."

